책소개

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

너른마루 2012. 10. 9. 16:42

 

 

그 풍경을 나는 이제 사랑하려 하네

<안도현의 노트에 베끼고 싶은 시>   

안도현 지음

 

 

오랜만에 읽는 시집이다.

 

 

무한 바깥

정현종

 

방안에 있다가

숲으로 나갔을 때 듣는

새 소리와 날개 소리는 얼마나 좋으냐!

저것들과 한 공기를 마시니

속속들이 한 몸이요

저것들과 한 터에서 움직이니

그 파동 서로 만나

만물의 물결

무한 바깥을 이루니

 

개인적으로 무한 바깥이라는 의미와 어감이 참 좋다.

 

 

 

파안

고재종

 

마을 주막에 나가서

단돈 오천 원 내놓으니

소주 세 병에

두부찌개 한 냄비

 

쭈그렁 노인들 다섯이

그것 나눠 자시고

모두들 볼그족족한 얼굴로

 

허허허

허허허

큰 대접 받았네그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했던 시.

한 장의 스냅사진 같은 시다.

굳이 줄줄이 사연을 늘어놓지 않아도 그 풍경이 모두 그려지고 그 안에 흐르는 따뜻하고 소박한 마음까지 느껴지는.

어찌보면 진정한 4-D는 그 안에 흐르는 정감까지도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태백산행

정희성

 

눈이 내린다 기차 타고

태백에 가야겠다

배낭 둘러메고 나서는데

등 뒤에서 아내가 구시렁댄다

지가 열일곱 살이야 열아홉 살이야

 

구시렁구시렁 눈이 내리는

산등성 숨차게 올라가는데

칠십고개 넘어선 노인네들이

여보 젋은이 함께 가지

앞지르는 나를 불러 세워

올해 몇이냐고

쉰일곱이라고

그중 한사람이 말하기를

조오흘 때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한다는

태백산 주목이 평생을 그 모양으로

허옇게 눈을 뒤집어쓰고 서서

좋을 때다 좋을 때다

말을 받는다

 

당귀집 귀때기 새파란 그 계집만

괜스레 나를 보고

늙었다 한다.

 

아내가 구시렁거리는 소리와 눈이 내리는 구시렁 구시렁 소리, 노인들이 말하는 “좋을때다”와 주목이 받아주는 “좋을때다”란 구절이 참으로 절묘하다.

한편으로 그 나이때의 인생이란 자기가 산 가장 많은 나이일지라도 더 나이든 사람이나 나무입장이라면 한참 좋을때가 아니겠는가?

시 한편에 인생철학과 해학이 녹아있어서 읽는 사람을 절로 미소짓게 한다.

 

이 시집은 저자가 사랑했던 다양한 종류의 시가 있어서 지루하지 않고 몇몇 시는 내 취향에도 안성맞춤이어서 여러번 읽을 수록 단맛이 난다.

특히 보는 것만으로 절로 웃음짓게 하는 정겨운 사진과 함께 하여 학창시절 잃어버린, 시 읽는 즐거움을 새삼 느끼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