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 드 보통 지음
알랭 드 보통이 25세의 나이에 쓴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통속적인 젊은 날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젊은 날에 순식간에 빠진 사랑, 정열적인 나날, 급작스런 헤어짐과 또다른 사랑이 오기까지, 사랑의 일생을 이야기 한다.
알랭 드 보통에게 감탄한 부분은 큰 에피소드 없이도 사랑에 대하여 커다란 공감을 얻어낸다는 점, 그리고 사랑은 감정에 관한 일임에도 이를 생각의 힘으로 풀어냈다는 점이다.
이야기 순서대로 맘에 드는 구절들을 빼내 인용해보면
《사랑에 빠지다》
정말 무서운 것은 나 자신을 용납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워하면서 - 어쩌면 그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 다른 사람은 끝도 없이 이상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도 클로이가 인간[이 말이 내포하는 모든 의미에서]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중단하고 싶었던 내 욕망도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희망이 자기 인식에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있는 것 - 비겁함, 심약함, 게으름, 부정직, 타협성, 끔찍한 어리석음 같은 것 -을 상대에게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랑에 빠진다. 우리는 선택한 사람 주위에 사랑의 방어선을 쳐놓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가 가진 결함으로부터 자유롭고, 따라서 사랑스럽다고 결정해 버린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우리 내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함을 찾으며,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합을 통하여 인간 종에 대한 불확실한 믿음[자기 인식에서 나온 모든 증거에 위배됨에도 불구하고]을 유지하고 싶어한다.
《사랑의 절정》
순간 나는 클로이의 팔꿈치 근처에 있던 무료로 나오는 작은 마시멜로 접시를 보았다. 갑자기 내가 클로이를 사랑한다기 보다는 마시멜로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마시멜로가 어쨋기에 그것이 나의 클로이에 대한 감정과 갑자기 일치하게 되었는지 나는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너무 남용되어 닳고 닳아버린 사랑이라는 말과는 달리, 나의 마음 상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것 같았다. 더 불가해한 일이지만, 내가 클로이의 손을 잡고 그녀에게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나는 너를 마시멜로한다고 말하자, 그녀는 내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것이 자기가 평생 들어본 말 중 가장 달콤한 말이라고 대답했다.
《사랑의 진행》
의미론적으로 볼 때 사랑과 관심이 거의 맞바꾸어 쓸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나는 나비를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는 “나는 나비에 관심이 많다”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며, 그 관심으로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무슨 말을 하는지 스스로 더 풍부하게 느끼게 해준다는 것이다. 클로이는 나를 이해하기 때문에 나에 대한 그녀의 행동에는 “나”의 확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요소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녀가 내 기분의 많은 부분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것, 그녀가 내 취향을 아는 것, 그녀가 나 자신에 대해서 나에게 이야기해주는 것, 그녀가 나의 일상과 습관을 기억하는 것, 그녀가 나의 공포증을 인정하는 것에는 다양한 “나”의 확인이 수도 없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랑의 끝(이별)》
사랑의 거부가 아무리 불행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사랑을 이타성과 동일시하고 거부를 잔인성과 동일시할 수 있을까? 내가 클로이를 사랑하는 것은 도덕적이고, 그녀가 나를 거부하는 것은 비도덕적일까? 그녀가 나를 거부하면서 죄책감을 느낀 것은 사랑을 내가 이타적으로 그녀에게 준 것으로 보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나의 선물에 이기적인 동기가 있었다면, 클로이도 똑같이 이기적인 동기에서 관계를 끝내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사랑의 종말은 이타주의와 이기주의, 도덕성과 비도덕성 사이의 충돌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두 충동 사이의 충돌로 나타난다.
《이별의 아픔》
그리스 신들의 저주와는 달리, 심리적 운명론에서는 적어도 운명으로부터 탈출할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이드가 있는 곳에는 에고도 있을 가능성이 있다. 나에게 침대에서 일어날 힘만 있었어도 긴 의자까지 갈 수 있었을 것이고, 그곳에서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처럼 나의 고통을 끝내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집에서 나가 도움을 구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정신도 회복할 수가 없었다. 나는 심지어 이야기를 할 수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과 내 고통을 나눌 수가 없었다. 그 결과 나는 완전히 박살이 나고 말았다. 나는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블라인드는 내려놓았다. 조그만 소리나 빛에도 짜증을 냈다. 냉장고의 우유가 상했거나 서랍이 한번에 열리지 않으면 공연히 속이 상했다. 내 손아귀에서 모든 것이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조금이라도 통제력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은 나 자신을 죽이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상실의 극복》
클로이와 보낸 시간은 주름이 잡히며 폭이 좁아졌다. 수축하는 아코디언 같았다. 내 사랑 이야기는 얼음 덩어리와 같아서, 현재로 들고 오는 동안 차차 녹아버렸다. 그것은 마치 역사의 일부가 되어버린 현대의 사건, 역사가 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중심적 세목으로 축소되어버린 사건 같았다. 그 과정은 마치 영화의 카메라가 1분에 수많은 프레임을 찍지만, 그 대부분은 버리고 수수께끼 같은 변덕을 따라 몇가지 프레임 - 그 프레임 주위에 감정적 상태가 유착되어 있기 때문에 -을 선택하는 것과 같았다. 몇몇 교황이나 군주나 전투로 축소되고 상징되는 한 세기처럼, 나의 연애는 몇 개의 아이콘적 요소[역사가들이 고르는 요소들보다는 무작위적이지만 마찬가지로 선택적인]만 남았다.
《또 다른 사랑》
레이첼의 모습은 나에게 금욕주의적 접근 방법의 한계를 일깨워주었다. 사랑에 고통이 없을 수 없고, 사랑이 지혜롭지 못한 것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잊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랑은 비합리적인 만큼이나 불가피했다. 불행히도 그 합리성이 사랑을 반박하는 무기는 되지 못했다. - 금욕주의의 핵심에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실망시킬 기회를 주기 전에 스스로 실망해버리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알랭 드 보통의 표현력을 극적으로 보여주는(내 주관적인) 장면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특히 “나는 너를 마시멜로 한다.”라는 대목은 독특한 발상이요 통찰이다.
우리 주변에 많은 책이 있지만 이렇게 가벼운 소재를, 우리 주변에 흔히 있는 일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서 결코 지루하지 않은(때론 절로 무릎을 치게하는) 지속적 사유의 결과물을 보여주는 작가는 흔치 않다.
“사유의 전염”이라 불릴 현상을 통해 보통의 독자가 생각의 즐거움을 같이 누리게 해줌으로써 독서의 또 다른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