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무척 좋아하는 김용택 시인의 시집
그러나 아직도 시집을 읽으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절감한 책이기도 하다.
이 하찮은 가치
11월이다.
텅 빈 들 끝,
산 아래 작은 마을이 있다.
어둠이 온다.
몇 개의 마을을 지나는 동안
지나온 마을보다
다음에 만난 마을이 더 어둡다.
그리고 불빛이 살아나면
눈물이 고이는 산을 본다.
어머니가 있을 테니까. 아버지도 있고.
소들이 외양간에서
마른풀로 만든 소죽을 먹고,
등시린 잉걸불 속에서 휘파람 소리를 내며
고구마가 익는다.
비가 오려나보다.
차는 빨리도 달린다. 비와
낯선 마을들,
백양나무 흰몸이
흔들리면서 불 꺼진 차장에 조용히 묻히는
이 저녁
지금 이렇게 아내가 밥 짓는 마을로 돌아가는길, 나는
아무런 까닭 없이
남은 생과 하물며
지나온 삶과 그 어떤 것들에 대한
두려움도 비밀도 없어졌다.
나는 비로소 내 형제와 이웃들과 산비탈을 내려와
마을로 어둑어둑 걸어들어가는 전봇대들과
덧붙일 것 없는 그 모든 것들에게
이렇게 외롭지 않다.
혼자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금의 이 하찮은, 이유가 있을 리 없는
이 무한한 가치로
그리고 모자라지 않으니 남을 리 없는
그 많은 시간들을 새롭게 만들어준, 그리하여
모든 시간들이 훌쩍 지나가버린 나의 사랑이 이렇게
외롭지 않게 되었다.
삶
매미가 운다.
움직이면 덥다.
새벽이면 달고 운다.
하루가 긴 날이 있고
짧은 날이 있다.
사는 것이 잠깐이다.
사는 일들이 헛짓이다 생각하면,
사는 일들이 하나하나 손꼽아 재미있다.
상처받지 않은 슬픈 영혼들도 있다 하니,
생이 한번뿐인 게 얼마나 다행인가.
숲 속에 웬일이냐, 개망초꽃이다.
때로 너를 생각하는 일이
하루종일이다.
내 곁에 앉은
주름진 네 손을 잡고
한 세월 눈감았으면 하는 생각
너 아니면 내 삶이 무엇으로 괴롭고
또 무슨 낙이 있을까.
매미가 우는 여름날
새벽이다.
삶에 여한을 두지 않기로 한,
맑은
새벽에도 움직이면 덥다.
섬진강 30
1970
공장 담벼락 응달 밑 눈이 다 녹았다.
동무들이 새로 불어났다.
양지쪽 시멘트 벽에 기대서서 해바라기를 한다.
자기 동네 누가 새로 서울로 올라왔다고도 하고
고향 마을 돌담이 헐리고 초가지붕이 뜯긴단다.
좁은 빈터에서 동무들이 배구를 한다.
갈라진 시멘트 바닥 틈으로 민들레 새싹들이 돋았다.
남쪽 마을 언덕에 느티나무 까치집을 새로 짓고
남쪽 가지부터 새순이 눈틀 것이다.
아버지는 강 건너 산밭으로 거름을 지고 오르고
어머니는 보리밭을 매겠지.
누이는 중학교에 잘 갔는지. 입학금은 어떻게 냈는지.
일요일이면 어머니는 동생들 차비를 구하러
이웃 마을 골목길을 달음질하고
동생들은 쑥 돋는 논두렁에서
하얀 뿌리가 나올 때까지 땅을 차며 서 있을 것이다.
때 낀 배구공이 하늘로 솟아오르고
동무들의 함성소리가 들린다.
바닥이 다 보이는 강물 속 돌맹이같이 해맑은 얼굴들,
봄볕은 가난한 얼굴들의 그늘까지 벗긴다.
붕대 감은 손이 자꾸 욱신거린다.
고향으로 다시 갈까.
직장을 옮길까.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난이 약속된 땅은 서러운 땅이다.
나도 발끝으로 땅을 툭툭 찬다.
동부리가 걸렸는지 발가락이 아프다.
이가 마주치는 이 가난,
돌맹이 끝이 보인다.
흩어진 흙을 모아 다시 돌맹이를 덮는다.
햇살 때문인지
이마가 뜨겁다.
그해 그 봄
나는 그렇게 서울
영등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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